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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연기 전공서적

배우와 목표점- 데클란 도넬란/ 목표점의 규칙들

by paust91 202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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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목표점
국내도서
저자 : 데클란 도넬란 / 지민주,허순자역
출판 : 연극과인간 201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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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있는 배우들이 읽기에 좋은 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배웠고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던 배우들이 읽었을 때 더 이해하기 쉬운 책.

현장에서 수 많은 변수들 속에서, 인물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할 때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 책들 중에 한 권을, 한 단락을 소개하겠다.







1. 목표점

1. 항상 목표점이 존재한다.

먼저 대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배우에게 있어서 모든 '행위'는 무언가에게 행해지는 일이어야 한다. 목표점 없이 배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표점은 실제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일 수도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리고 전혀 예외가 없으며, 깨트릴 수 없는 첫 번째 규칙은 반드시 목표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미오에게 경고한다.'
'캐풀렛 부인을 속인다.'
'유모를 놀린다.'
'창문을 연다.'
'발코니에 발을 딛는다.'
'달을 쳐다 본다.'
'가족을 회상한다.'

목표점은 '당신 자신'일 수 있다. 아래와 같이 말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금 다짐을 한다.'

배우는 목표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배우는 '나는 죽는다.'를 연기할 수가 없다. 목표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배우는 다음과 같은 연기를 할 수가 있다.

'죽음을 환영한다.'   '죽음과 맞서 싸운다.'    '죽음을 조롱한다.'          '삶을 위해 발버둥 친다.'








외부의 목표점

능동적인 목표점은 에너지를 외부에 배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고, 거기에 반응을 할 수 있고, 그것에 의지할 수 있게 한다. 목표점은 곧 외부에 위치한 배터리가 된다.
그리하여, 항상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자문하는 대신 '목표점이 하고 있는 게 뭐지?' 라고 묻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된다.
아니 '목표점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만드는 거지?'라고 묻는게 더 좋다.

첫 번째 질문은 목표점에서 에너지를 강탈하여 '내(i)' 안에 둔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배우에게 위험한 단어가 되는 경향이 있어,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보통 '나를'이 보다 도움이 된다.
배우는 보다 많은 에너지를 목표점에 둘 수 있을 때 더 자유로워진다. 반면, 목표점에서 에너지를 앗아가는 것은 실제로 배우를 마비시킨다. 
만약 이리나가 목표점에서 힘을 빼앗아 그것을 자신 속에 가둔다면, 연기에 장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리나는 그녀의 배역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하기 원했을 모든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원하는 것을 나열해보는 것은 리허설 초기 단계에서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리나가 줄리엣이 보는 것을 보기 위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줄리엣은 무엇을 보는가? 두려워해야 할 아버지, 상대해야 할 어머니, 피해야 할 미래와 구애 받고, 길들여지고, 지지받고, 경고 받고, 놀라고, 격려 받고, 발견되고, 재확신되고, 개방되고, 
꾸지람 듣고, 고무되고, 고귀해지고, 억제되고, 흥분되고, 누그러지고, 유혹당하고, 거부당하고, 사랑받는 로미오다. 
줄리엣에게 장면이란 자신과 그녀가 원하는 바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장면은 그녀가 보고 상대해야 할 수많은 로미오들에 관한 것이다. 
  • 상대의 대사를 봐야하는 이유, 관계 맺기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이리나의 에너지는 내부로부터, 뭔가 집중된 내부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줄리엣이 인식하는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다.
바로 그 녀의 뺨을 애무하는 산들바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결혼, 그녀가 욕망하는 입술이다. 목표점이 전부이다.
 로미오를 연기하는 배우는 발코니장면을 자신보다는 줄리엣에 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리나는 장면을 줄리엣보다는 로미오에 관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 우린 흔히 '혼자 자위한다'라는 의미로 혼자 연기한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떤 욕구와 욕망을 본인으로부터 끌어올려 상대방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나 할것들만 하는 그런 배우들을 볼 때 하는 말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상대의 대사, 상대의 호흡, 상대의 몸짓,눈짓,발짓을 봐야하는 것. 그것이 연기다.


모든 실질적인 목적들(purposes)에는 에너지의 내적 원천이 없다. 모든 에너지는 목표점에서 발생한다.




목표점이 아닌 것.(p 49)

목표점은 목적도, 바람도, 계획도, 이유도, 의도도, 목표도, 초점도, 동기도 아니다. 동기(motive)는 목표점으로부터 발생한다.  동기는 우리가 왜 무언가를 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제 왜(why)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지가 흥미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가차 없이 왜를 묻는 것은 배우를 옭아맬 수가 있다. 왜 줄리엣은 로미오와 사랑에 빠졌을까?
이리나가 그 질문에 완전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녀는 요점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완전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목표점은 나의 '초점(focus)도 아니다. 초점은 오해를 일으킬 수있는 단어이다. 초점은 마치 그것이 목표점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 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는 뭔가에 초점을 둔다'라는 말은 '나는 뭔가를 본다'라는 말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목표점은 보여야 하는데, 내 '초점의 포인트'라는 말은 내가 그 지점에 초점을 둘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목표점은 주인이다. 하지만 '초점의 포인트'라는 말은 왠지 하인처럼 들린다.
 배우에게는 목표점에 반응하는 것보다는 초점의 포인트를 선택하는 것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어디다 초점을 둘지 고르는 것은 배우로 하여금 더 많은 통제권을 가진 듯한 느낌을 갖 든다.
 그렇지만 이 특별한 통제는 오랫동안 함께 할 친구는 아니다. 이 특별한 통제는 이리나를 자신의 내면으로 교묘히 회귀시키는 경향이 있다. 초점의 포인트를 선택하는 것은 외부 세계와 자양분을 주는 모든 자극을 가릴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외부에 있으면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에너지를 배우의 내면에 재위치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통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먼저 불편한 선택을 한 가지 고려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번쨰 불편한 선택: 집중인가 관심인가
the first uncomfortavle choice: concentration or attention

이것은 배우가 당면한 불편한 선택들 중 첫 번째 것이다. 여기서 딜레마는 이것들이 얼핏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를 파괴해야 하는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정말 유사한데 보험에 든다 생각하고 둘다 
소유할할 수는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 없다. 한가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려야만 한다. 우선, 집중과 관심부터 살펴보자. 집중이 관심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뭔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집중할 수는 없다. 집중 아니면 관심, 이것이 바로 첫 번쨰 불편한 선택이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을 하기 전에 다음을 고려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심은 목표점에 관한 것이고, 집중은 나에 관한 것이다. 내가 외적 대상에 깊이 집중을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깊이 집중하게 되면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나는 점차 그 외부의 대상을 덜 보고, 결국은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를 보는 것으로 끝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상태로 끝나는 것이다. 집중은 타자에 대한 것처럼 가장하지만 아니다.
집중은 외부 세계에 대한 것인 척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관심보다는 집중을 택하려 하는데 이유는 집중은 자율적으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며,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집중을 대량으로 분비하고, 그것이 오고 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때문에 집중이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이다. 관심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용하고, 또 놀라운 것이다.
집중은 또한 무서울 수 있다. 이리나가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난관에 대한 해결책을 짜내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창조의 핵심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느낌을 구축할 수도, 생각을 짜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리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물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뿐이다.
미칠 듯이 이리나가 사물을 주의 깊게 보도록 자신을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린 모두처럼 그녀는 다만 자신에게 보지 '않기를'요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녀는 자신을 눈멀게 할 수 있다. 그녀는 스스로 사물을 '바라보게'할 수는 있겠지만, '바라보는 것'은 '보기'와 전혀 다르다. '보기'와 '바라보는 것'의 차이는 배우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바라보는 것'은 초점을 둘 곳을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보기'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바지를 입지 않은 교구목사의 경우처럼, 나는 보지 않고서도 뭔가를 바라볼 수 있다. '보기'는 보이는 것이 나를 놀래주도록,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를 수 있게 하는 자유를 가짐을 함축한다.


굶주림

배가 고픈데, 집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아무리 자주 냉장고를 뒤진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비어있을 테니 말이다.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외부이다.
만일 집안에 머문다면, 아무리 뻔질나게 시렁을 뒤져본다 할지라도 굶어죽게 될 것이다. 배우에게 '보기'는 외부로 나가는 것과 같다. 
집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안전한 것처럼 보이고, 길거리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겁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건 망상이다.
집에서는 안전하지 않고, 길에서만 안전하다. 그러니 집으로 가지 말지어다.
  • 집중보다는 관심. 바라보는 것이 아닌 본다 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연기하기
  • 그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2.두려움

목표점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차단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두려움(fear)이 목표점과 우리를 갈라 놓는다. 
두려움은 유일한 에너지의 우너천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 우리를 굶주리게 하는 방식이다.


  • 시간의 분리

연기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지금(now)'속에서 해결된다.

두려움은 '지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존재하고 지배하기 위해 가짜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를 두 개의 가짜 시간대로 쪼갠다. 절반을 과거라 부르고, 다른 절반을 미래라고 부른다. 
그는 오직 이 두 곳에서만 살 수 있다. 두려움은 불안(anciety)으로 미래를 지배하고, 죄책감(guilt)으로 과거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배우는 현재에 놓여있는 목표점을 떠나서 두려움과 함께 과거로, 미래로 도망치도록 현혹당하는데, 그 결과 연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비록 그 영향이 현재에서 느껴진다 할지라도 장애란 과거와 미래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명백한 예는 '대사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제로 배우들이 현재에 머물러 있을 때는 대사를 거의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리나가 '오 이런! 다음 대사가 기억나지 않아'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하게 된다. 현재를 포기하고서 말이다.
'난 대사를 잊게 될 거야'라는 말은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리나에게 지금 대사를 잊어버리도록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의 또 다른 고전적인 수법은, '내가 지금 한 연기는 끔찍했지만, 난 다음에는 정말 잘할 거야!'라는 말이다. 
두 번째의 나는 과거와 놀아나기 위해서, 혹은 미래가 두려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현재를 냉대하는 것이다. 배우가 현재에 머물러있는 한 두려움은 숨을 쉴 수 없다.


  • 현존(presence)

배우는 현존하고자 노력해야 하는가? 정답은 아니오 이다. 우리는 이미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존하고자 노력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중 부정으로 작업할 수 있을까? 
가령, 스스로를 부재하지 않도록 노력해볼 수 있을까? 어려움인 즉 '노력'은 배우를 집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고, 집중은 관심의 흐름을 경직시키고 목표점을 차단시킨다는 것이다.

1.목표점의 첫번째 규칙- 나는 이미 현존하기에 현존하게 될 수는 없다

현존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행하는 기발한 사기 행위이다. 왜냐하면, 뭔가 하려고 애쓴는 것은 집중하도록 만들고 제자리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안주하고 있는 현 상태가 되고자 고군분투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혼란시키는 트릭을 사용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방문하여 그 집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는데, 주인이 갑자기 뛰어 들어와 앉으라 강요한다고 상상해보라. 나는 앉아 있지만 계속 노력하고, 왠지 제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계속 더 잘 '앉고자' 노력하고 그래도 그는 점점 더 불만을 표시하고 마침내 미친 듯이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당신이 현재에 있고자 노력할 때 생기는 일들이다.

연기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법의 하나는 차분하게 자신이 현존해 있으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유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아니, 마취제를 사용해서라도 당신은 스스로를 납치해 달아날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는 자신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현존하려고 고군분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현존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것은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훔쳐갈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노라고 자신을 속일 수 있다.



  • 규칙의 은폐

두려움은 목표점에 대한 지배력이 없지만, 목표점이 당신을 저버렸다고 믿게 만들 수는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두려움은 목표점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고, 차례차례 규칙들을 하나씩 감추려고 한다.
 ' 그것은 거짓말이야, 넌 오직 혼자일 뿐이라고. 넌 단지 너 자신에게만 의존할 수 있다고'라고 두려움은 속삭인다.


맞어. 긴장하면 결국 믿을 건 나밖에 없어라는 사고로 공연이나 발표를 임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릴렉스한 상태에서 잘 있다가도 직전만 되면 누군가를 쳐다보고 바라본다는 그 의식때문에 긴장이 되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국 무대에 들어 서기 직전, 믿을 건 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 안으로 점점 꺼져 들어갔다.



  • 공간의 파괴
보기 위해서는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리(distance)는 우리에게 역량을 제공해준다. 우리가 어떤 것과 동일한 장소에 서 있다면 결코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은 
이제 두 번째 규칙,즉 목표점은 항상 외부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한다는 규칙을 숨겨야 한다
그것은 상상력이 전적으로 내면에서 일어난다고 가장함으로써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감각을 파괴한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 상상력은 내적인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바로 내 안에 있다.'이 무정한 논리는 우리에게 타격을 입힌다. 이제 당신과 목표점 사이에는 역량을 지닌 거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움이 되는 심연은 사라졌고, 이제 당신은 마치 벽에 얼굴을 댄 것처럼 외부세계와 완전히 밀착돼있다. 거리가 없기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다.


  • 시간의 파괴

두려움은 또한 목표점이 이미 존재한다는 세 번째 규칙을 저해한다.

그는 시간을 평행으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거울에 쪼개어 넣고 당신을 혼란시킨다. 과거와 미래라는 이 거울들은 당신을 교란시켜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대는 목표점을 못보게 한다. 
게다가 두려움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친구들을 불러들인다. 비난, 망각, 처벌이라는 그의 친구들은 당신을 통제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책임이라는 자는 당신의 어깨 위에 들러붙고, 의무라는 자는 당신의 목에 사슬을 두른다. '뭔가를 발명하는 건 당신이야. 그 무엇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건 없어. 당신의 의무감이 모든 걸 만들어내고, 활기 있게 만들고, 조절하는 거야. 당신만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거야.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도 당신 책임이야.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 모든 이를 실망시키고 있어. 왜 그렇게 게으르고/쓸모 없고/속이 비었고/생각이 없고/상상력이 없고/재능이 없는 거지?'

 두려움보다 더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없으며, 도덕주의자는 두려움이 낯선 존재가 아니다.





  • 구체적인 것의 파괴
  • 움직임의 파괴

두려움은 이제 목표점이 항상 구체적임을 명시하는 네번째 규칙을 파괴하기 위해 활동한다.

'틀렸어!, 목표점은 수동적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불변한다고!'라고 두려움은 말한다.

내가 상대역의 연기가 어색해서 장면을 생동감 있게 연기하지 못한다고 불평할 떄, 두려움은 다시 살아난다. '난 그에게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해!' 유연하지 못한 상대역은 영감을 주지 못할 순 있다. 하지만 만일 내가 파트너의 연기의 질을 모니터하게 된다면 
거기엔 뭔가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 유연하지 못한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닌지를 되묻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된다. 



결론

  • 모든 걸 통제해야만 하고 통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 집중과 관심은 다르다. 집중은 현재를 살기 위해 무언가를 노력한다. 관심은 현존 도중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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